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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 바꾼 동아시아 모습
2018. 07.04(수) 10:19확대축소
사회 전면의 변화를 이끌어낸 상인들





55. 상인이 바꾼 동아시아 모습



#고대 그리스의 번영 이끈 상업

서구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에서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되었다. 같은 지중해의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에 비해 그리스는 산지가 많아 땅이 척박한 편이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 사람들은 일찍부터 곡물을 구하려고 바다로 나섰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의 신화 세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지브롤터 해협에서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코카서스 산맥 지역까지로 넓게 걸쳐 있다. 곡물과 상대적으로 그리스는 전체적으로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어서 곡물 대신 과수 재배에 유리했다.

중국과 한국은 사·농·공·상의 순서로 상업이 직업상 가장 낮았지만, 위와 같은 자연조건을 가진 그리스는 원래부터 상업이 가장 중요했다. 그에 관한 자세한 것은 지면상 각설하고 델로스 섬의 예를 들어보자. 델로스 섬은 아폴론 신의 탄생지라는 신성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에게 해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정학적 장점 덕분에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요건을 원래부터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바위투성이 섬은 기원전 5세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가 될 수 있었고, 기원전 2세기에는 ‘국제항‘으로 선포되어 세금이 없는 자유무역항이 되었다. 그리하여 델로스 동맹 같은 국제회의가 모두 이 섬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한편 유럽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오늘날의 시리아·이란에 해당하는 페니키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을 왕래하는 그리스 상인들이 자음만 있는 페니키아 문자를 그리스에 전해주었고, 그리스에서 여기에다가 모음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마침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서양어의 알파벳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문자뿐만 아니라 그리스 상인들은 당시에는 유럽보다 앞섰던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전해주는 문명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그리스 상인들은 다른 문화나 국가의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니 자연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는 ‘말’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논리의 발달로 이어져 그리스 철학의 발전을 추동시켰다. 또한 세계 역사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목적은 기실 상업을 위한 것이어서 그 배후에는 상인이라는 중심 세력이 있었다.



#상업을 천시한 중국

그런데 그리스와는 완전히 상반되게 중국에서는 상업이란 직업이 태생적으로 좋지 않았다. 제후국이었던 주나라가 은왕조를 멸한 후, 주왕조는 은나라 사람들을 박해했고, 정착생활이 불가능해진 은나라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이 장사치가 되어 생계를 유지했다. 은은 본디 도읍이 상(商 )지역이었다가 후에 은 지역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상나라라고도 한다. 상인(商人)의 상자는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한자에 있어서 장사하는 사람을 상(商)과 고(賈)로 나누는데 상은 떠돌아다니는 장사꾼, 고는 한 곳에 살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니, 상인은 떠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던 상나라 사람에서 유래한 단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 역사부터 중국은 상인이란 직업이 다분히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부정성은 20세기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체적으로 유지되었다. 춘추전국 때가 되면 처음으로 상인이 개인 이름으로 역사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는 춘추말 철기가 발명되면서 농업기술이 향상되었고, 농업 생산이 증가된 결과 잉여 생산물이 나왔으며, 이것을 상인들이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팔아 상거래가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도시간의 왕래에 따라 백성들의 국가간 이동도 이전보다 쉬어졌다. 사상가들도 상인들이 발견하거나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지역 이동을 하면서 학문의 교류를 통해 제자백가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는 중국인들의 상인에 대한 원초적인 부정적 선입관이 투영된 다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시장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물건을 가지고 와서 필요한 물건 바꿔가는 장소여서 당시 관리는 백성들이 분쟁 없이 교역 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세금을 걷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사내가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장 정세를 살피더니 농간을 부려 이익을 독점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겨 그 일로 인해 상인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했다.

농단(壟斷)이란 단어는 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표현으로 높고 이어져 있지 않은 곳, 즉 평지에 올라와 있는 언덕 같은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 사용하는 ‘이익이나 권리를 독점하다’는 의미로서의 농단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맹자’
의 이야기에서 규지할 수 있듯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상인은 농업생산에 해를 끼치고 사회체제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의(義, 정의)와 이(利, 이익)를 말할 때 이익을 대표하는 직업이 바로 상인이므로 유가적 윤리의 입장에서 천하게 보았다.

중국 상인들의 불행은 주왕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시황은 진 제국을 세우자 제일 먼저 상인 숙청을 단행했다. 기실 진시황의 아버지 여불위(呂不韋)는 조나라의 거상으로서 그를 중심으로 모인 상인들이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없으면 정치도 혁명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시황은 황제가 된 후에는 상인은 오직 돈만 위하는 악인이고, 그 집단은 관료와 결탁하여 온갖 나쁜 일을 하는 부정부패의 온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수와 상인들 가족들을 대거 강남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남은 오·월·초(현재의 저장, 부젠, 광둥) 지역으로 당시에는 사람이 살기 힘든 편벽된 곳이었다. 강남지역이 개발이 되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이니 매우 늦다. 강북지역을 죄수와 상인이 없는 곳으로 정화시키고 중국을 농업국가로 만든다는 것이 진시황의 목표였다. 상인들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쫓겨날 때 호곡 소리가 천지에 가득했다고 한다. 상인들은 이주 중 많이 죽고 이주한 후에도 현지인의 박해를 받아 산으로 도망하기도 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면 바다를 통해 해외로 가서 장사를 했으니, 이것이 바로 화교가 생기게 된 최초 원인이었다.

화교의 급속한 확산은 중국의 대혼란기 때 나타났다. 대표적 예로 9세기말에 일어난 당나라의 황소 난을 들 수 있다. 통치 불능의 상태에서 대학살이 만연하자 중국인들의 국외탈출이 급증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 역시 화교 확산의 원인이 되었고, 명나라 때는 남부지방이 조정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남부인들에게 폭정을 펼치자 해외이주자들이 대거 이어졌다.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란 사람이 화교를 규합하여 반청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자 당시 네덜란드인이 점령하고 있던 대만을 정복하여 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화교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니, 가장 증오하는 진시황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에 오천만 명 정도의 화교가 있는데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다시 중국 상인의 이야기를 계속 잇자. 진시황 때부터 핍박받았던 상인들은 당나라 이후 사정이 좀 더 좋아졌다. 당나라 때부터 상인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벼슬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송·원 시대에는 서북 변경지역과 동남 연해에서 국내외 무역을 하는 많은 상업도시들이 생겼고, 여기서 상인, 서비스업 종사자, 수공업자, 하급관리 등이 시민계층으로서 활동했다.

여기서 시민이란 서구에서 말하는 시민혁명을 통해 등장한 시민계급, 즉 citizen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도시의 산업자본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서구 언어를 번역한 시민과 중국에 있었던 시민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고유의 시민은 ‘성시거민(城市居民, 성에 거주하는 사람)의 약자이다.

18세기 초부터는 유럽을 통해 세계 무역에 눈을 뜨고, 사상적으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는 실학이 새로운 사조로 자리 잡은 것이 상인들의 위상 제고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와 같이 당나라 이후 상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폄하되고 경시되었으며 통치자들은 상인의 지위나 역할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상업이란 중국의 왕조가 망할 때까지 소위 사대부들이 후손들에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한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한편 진시황제 때 그토록 박해 받았던 강남지역이 현대에는 가장 잘 사는 곳이 되었다. 덩샤오핑이 1970년대 개혁개방을 하면서 광동과 복건성을 가장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했기 때문인데 고지식하고 변통이 없는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인들에 비해 남부인들은 역사적으로 장사의 기술을 익히면서 돈을 버는 방법을 터득했다. 남부인들이 자본주의적 인간형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에 서구를 향한 개혁개방의 전초지로 이곳을 선택했던 것이다. 현재 동남 연해지역이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것은 진시황의 강제 이주의 역설이다.





삼국시대부터 사·농·공·상 신분의식이 지배적

일본은 상인 주도로 근현대화 이룩 강대국 발전



#중국의 복사판 ‘한국’

이제 한국 쪽을 보자. 한국의 상인에 대한 천시도 중국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삼국시대부터 사·농·공·상의 신분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여서 상인이 그 틀을 깬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보고가 한 때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했지만 그가 존경을 받은 것은 상인으로서가 아니라 장군과 귀족이라는 신분에 의한 것이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중국의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상인 세력의 도움 아래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려시대에 상인이 상류층 사회에 편입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장영실이란 특출한 장인이 세종에 의해 우대를 받지만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였고 조선은 장인이 천시되는 사회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이 후에 조선과 일본간에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중 단 한 명도 조선행을 택하지 않은 것은 조선의 상인이나 장인에 대한 천대가 어땠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중국·한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의 상인은 일찍부터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12세기부터 일본은 쇼군과 지역의 다이묘(大名)라고 하는 영주가 주종관계를 맺어 토지와 인민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소위 막부시대에 접어드는데 14·15세기 끊임없는 전란 속에서도 농업과 상공업을 장려했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자 잉여농산물을 타 지역으로 팔러가는 상인들이 많이 등장했고, 농산물과 함께 각종 생활용품들이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17세기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정치·사회가 안정되자 운송이 매우 활발해지고, 그에 수반하여 금융이 발전했으며, 경제에 여유가 있자 대중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예능과 문화가 요구되었다. 특별한 교양이 없어도 보고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성행하여 모든 계층이 보고 즐길 수 있었다.

18세기 에도(江戶, 지금의 교토)는 인구가 100만 명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일본 전체적으로도 에도, 오사카, 나고야, 가나자 같은 도시 인구가 전체의 5-7%가 되어 도시인구 2% 정도의 유럽보다도 더 많았다. 의사, 시인, 저술가, 다도, 꽃꽂이, 노(能), 가부키(歌舞伎), 비단, 자기, 부채, 종이, 옷, 중고품 수리, 동(銅) 제련업자, 목수, 도공, 유통업자, 운송업자, 금융업자 등의 다양한 직업 종사자들이 나름대로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상인가문도 등장했는데, 미쓰이(三井) 가문이 유명하다. 그 기원을 따라가면 ‘미쓰이재벌’의 시조로 평가받는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는 1673년 교토(京都)와 에도에 포목점을 열었다. 미쓰이 가문의 포목점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찰제와 현금 거래를 내세웠다. 특히 정찰제는 동양에서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서, 이는 기업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서양에서는 유대인들이 장사하면서 처음으로 정찰제를 도입했는데 정해진 가격에 매매한다 함은 그 사회가 ‘신뢰 사회’에 진입함을 의미한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서로 믿지 못하면 정찰제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입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서로에 대한 믿음, 즉 속이지 않는다는 원칙이 준수 됨이다.

반대로 가격을 마구잡이로 깎는 사회일수록 사회 구성원 간에 믿음이 적음을 반증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특히 못사는 나라에 가서 가격을 함부로 깎는 경우가 흔한데,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이다. 일전에 인도에 갔더니 인도의 상인들은 한국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가격을 두 배 이상 올려서 부른다고 한다. 하도 가격을 후려쳐서…



#상업 발전으로 선진국 도약한 일본

미쓰이 가문은 또한 비가 오면 고객에게 회사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빌려주는 등 현대식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일본의 개방이 본격화 되었던 메이지시대(1868-1912)에 미쓰이 가문은 은행, 무역, 광업 등에 진출하며 세력을 넓혔다. 1909년 지주회사격인 미쓰이합명회사(三井合名會社)를 세우고 재벌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시점에는 약 270개의 회사를 보유한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쓰이 재벌은 미쓰비시 재벌, 스미토모 재벌 등과 함께 점령국인 미국 등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해체됐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재벌이란 독특한 기업 형태는 정작 일본에서 사라지게 되었는데, 1960대 한국에서 그것을 들여와 오늘날 보는 기업 모습이 되었다.

한편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일본의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町人)이라 부르는데 죠닌은 일본문화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죠닌은 먼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를 전국에 세워 교육의 기회 확대를 선도했다. 죠닌은 차를 즐겨 마시고 그것을 고도의 예절로 발전시킨 결과, 차를 마시는 예술, 즉 다도(茶道)가 보편화 되었다. 그리고 서민적인 통속소설을 즐겨 읽고 그것을 유포시켜서 일본문학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공연예술인 가부키를 장려하여 일반 서민과 상인, 그리고 귀족인 무사들이 함께 공연을 관람함으로써 서구 그리스 연극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 통합에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그림에 투자를 하여 예술이 발전되었다.

바야흐로 상인이 중심이 된 죠닌문화가 일본문화의 근현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일본은 근대 이후 상인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고 통합되며 신분의 차이를 극복했으며,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기폭제를 만남으로써 바야흐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글 내용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이요,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앞선 것도 상업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양반·상놈 따지면서 상인을 천대할 때, 일본은 상인이 사회 전면에서 변화를 이끌었다. 그로 인해 일본은 현재 동양에서 유일하게 소위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현재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여긴다.





장춘석은



전남대를 나와 파리 제7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박물관장을 지냈고 현재 전남대 중어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샤머니즘’ ‘중한효행집 연구’ 등이 있다.

backdoor2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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