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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 책에 말걸기
2017. 12.26(화) 17:35확대축소
불빛처럼 퍼지는 사람 냄새, 눈물처럼 짠 사랑 냄새

- 최은미 ‘아홉번째 파도’



“어스름이 내려와 바다 안쪽의 마을 불빛들이 켜지면 어디선가 카레 냄새가 올라왔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 문을 열면 실내 한쪽에서 배어 나오던 냄새였다. 구멍이 숭숭한 옥수수 술빵의 시큼한 냄새가 아니라 불빛처럼 은은하고 따뜻하고 성기지 않게 퍼지는 냄새. 무언가가 그리워지는 냄새, 그래서 지극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게 만드는 냄새였다.”

강원도 S시에서 실제 일어난 시장 주민소환 투표를 모티프로 쓴 최은미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에는 해안도시 특유의 비릿한 바다냄새와 함께 여러 냄새가 스며있다. 35광구와 폐토장의 검은 탄가루냄새, 보건소와 약사여래상 약상자에서 풍기는 하얀 알약냄새, 자주달개비와 백화라일락 사이로 스치는 불안과 죽음의 냄새, 바닷가 끝집에서 나는 온기 어린 사람 냄새, 눈물처럼 짠 사랑 냄새.

스케일이 큰 소설이다. 핵발전소 건립을 둘러싼 정치인과 환경단체의 갈등, 진폐증 앓는 석회광산 주민들과 이들을 꾀어 잇속을 챙기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관계, 대기업의 정경유착과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탄압 등 소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꽤 많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 세 젊은이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보건소 약무주사 송인화, 공익근무 요원으로 복무 중인 약대생 서상화, 척주 국회의원 보좌관 윤태진.

세 사람에게는 마음을 짓누르는 탄빛 고통이 있다. 18년 전 시멘트회사에서 일한 송인화 아버지의 의문사, 시멘트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 서상화 아버지의 부당해고, 콜타르 때문에 생긴 윤태진의 병. 이들 고통스런 과거가 한 노인의 죽음을 계기로 실타래처럼 찬찬히 풀어지며 소설을 채워간다.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작가는 척주 구석구석을 보여주는데, 굵직한 주제를 체에 거르듯 정밀하게 그려가는 사이사이 광산촌 노인들과 광부들의 생활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과거의 비밀을 캐는 미스터리이고, 현실 고발 다큐이기도 한 소설에 작가는 또 멜로의 빛깔을 옅게 칠해 놓았다. 권력과 돈을 좇는 사람들 틈에 이와 대비되는 소박한 사랑을. 하지만 사랑은 안타깝게 지워지고 만다. 윤태진의 절망스런 미래와 서상화의 갑작스런 죽음은 지금 우리 사회에 가득한 탐욕을 강조하는 듯하다.

“서상화가 약봉지를 만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모든 소리와 구별되는, 약봉지 구겨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송인화는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질 방문 밖의 바다를 생각했다. 밤새 불어올 바람에 대해서도, 절벽 끝 같은 집에서 홀로 겪어야 하는 통증에 대해서도. 그때마다 노인이 퍼부은 저주가 가슴을 그었다.”

책 여기저기서 동해의 파도소리가 일렁인다. 그 소리에 따라 약봉지 구겨지는 소리, 해무를 뚫고 들려오는 굴착기 소리, 약사불 앞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소리, 촛불 든 주민들의 함성소리가 울음처럼 출렁인다.

작가는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그래선지 책을 덮고 나면 사람과 사랑, 두 단어를 곱씹게 된다. 세 젊은이의 암흑 같은 기억 위로 이 시대의 곪아터진 상처들이 겹쳐지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최은미의 ‘아홉번째 파도’는 병들대로 병든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 S시 주민들의 육성이 담겨있고, 취재를 바탕으로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르포에 가깝다. 사실이기 때문에 통증이 더욱 아프게 닿는다.

backdoor2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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